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보헤미아 왕국 (문단 편집) == 프로셰미슬 왕조의 번영과 몰락 == [[보헤미아 공국]]의 [[공작(작위)|공작]]이었던 [[오타카르 1세]]가 왕위를 인정받은 이후 5대 100여 년 동안 프로셰미슬 가문이 왕위를 계승하며 보헤미아를 번영시켰다. 내부의 혼란을 끝낸 프로셰미슬 가문과 보헤미아는 곧장 외부 진출을 꿈꾸었다. 심지어 엄청난 야심가로 부왕 [[바츨라프 1세]]를 상대로 왕위 반역을 일으켰었던 [[오타카르 2세]]는 [[독일왕]]위까지 노렸다. 능력과 욕심을 겸비한 오타카르 2세는 원래 강제로 성직자가 될 운명이었다가 후계자였던 형이 갑자기 죽은 덕분에 하루아침에 왕국의 유일한 후계자가 되었는데, 왕세자가 된 이듬해 1248년, 만 16 세의 나이로 아버지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켜 자신의 존재감을 세상에 알렸다. 결국 반란에 실패했지만, 다른 계승권자가 전무해서 바츨라프 1세는 오타카르 2세를 용서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시작부터 요란했던 오타카르 2세는 평생 동안 제국을 향해 거침없이 질주했다. 1250년 왕세자 신분으로 [[오스트리아 공국]]을 정복하여 오스트리아를 집어삼킨 것을 시작으로, 왕위에 오른 뒤에는 [[십자군 전쟁/기타 십자군#s-1.6|프로이센 십자군]] 참가[* 그 유명한 [[쾨니히스베르크]]가 오타카르 2세의 이름을 따 지어졌다.], [[헝가리 왕국]] 공격, [[케른텐 공국]] 합병, [[비텔스바흐 가문]]과의 전쟁 등 결혼해서 신혼생활 시기를 빼면 평생 전장에서 살다시피하며 왕국을 거대하게 키워내었다. 결국 죽을 때도 전장에서 죽었는데, [[합스부르크 가문]] 최초의 독일왕이었던 [[루돌프 1세]]와 자웅을 겨루다가 '''마르히펠트 전투'''에서 패배해 전사했다. 결국 자신의 죽음과 함께 황제의 꿈은 사라졌고 [[오스트리아 공국]]과 [[슈타이어마르크 공국]]까지 루돌프 1세에게 빼앗겼지만, 루돌프 1세 역시 보헤미아 왕국의 힘을 무시할 수 없었기에 오타카르 2세의 일곱 살짜리 아들인 [[바츨라프 2세]]를 동갑내기인 자신의 딸 유타와 결혼시킴으로써 패권 다툼을 종식시켰다. 그리고 그 일곱 살짜리 아이였던 [[바츨라프 2세]]는 나이를 먹자 아버지 시절의 위용을 되찾은 것을 넘어, 아버지보다 더 큰 왕국을 건설하였다. 결국 또다시 아버지처럼 신성 로마 제국 제위를 노리기 시작해 루돌프 1세의 아들이자 자신의 처형인 [[독일왕]]이자 오스트리아 공작 [[알브레히트 1세]]의 최대 라이벌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운명의 신은 슬라브인이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프로셰미슬 왕조가 최전성기에 달한 시점, 즉 [[바츨라프 2세]]가 [[헝가리 왕국]]의 왕관을 받은[* 다만 이때 헝가리는 분열되어 있는 상태로 바츨라프 2세 외에도 다른 '헝가리 국왕'이 존재했다. 이로 인해 바츨라프 2세 사후 그의 아들 바츨라프 3세는 헝가리 왕관을 물려 받지 못했고, 수년 뒤 헝가리 귀족들이 바츨라프 3세를 헝가리 국왕으로 추대한 뒤에야 비로소 바츨라프 3세가 헝가리 왕위 계승 분쟁에 관여할 수 있게 되었다.] 바로 다음해, [[결핵]]으로 추정되는 병에 걸려 바츨라프 2세가 '''고작 33세의 나이에 급사'''하며 왕국은 하루 아침에 최전성기에서 추락하기 시작했다. 뒤를 이은 것은 바츨라프 2세의 외아들인 [[바츨라프 3세]]였는데, 너무 놀기 좋아한다는 얘기를 듣다가 불과 16세의 나이에 [[올로모우츠]]에서 폴란드의 [[https://cs.wikipedia.org/wiki/Konr%C3%A1d_z_Boten%C5%A1tejna |보텐슈타인의 콘라트]]라고만 알려진 무명 기사에게 칼에 찔려 죽었다. 폴란드 정벌을 앞두고 군대를 소집하기 위해 올로모우츠에서 머물다가 암살이 벌어진 것. 왕이 점심을 먹고 혼자 낮잠, 혹은 산책 중에 벌어진 사건인데다가 사건 직후 분노한 왕의 수하들이 콘라트를 죽여버렸기에 암살의 배후는 오늘날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알브레히트 1세]], 폴란드 국왕 [[브와디스와프 1세]], 보헤미아와 모라바의 지방 귀족들[* 바츨라프 3세는 폴란드 정벌을 위해 자국 지방 귀족들에게 세금을 뜯어내서 불만이 거세진 상태였다.]이 의심을 받았지만, 당연히 당사자들 모두 부인했고, 어느쪽이든 사실은 당시 바츨라프 3세를 상대로 암살이라는 극단적인 수단[* 걸리면 파문에 사회적으로 매장될 수준으로 명예가 실추.]을 쓸 필요는 없는 상태였다. 심지어 아예 특별한 배후가 없고 그냥 바츨라프 3세의 술친구였던 콘라트가 지극히 사적인 이유로 홧김에 저지른 살인이라는 가설도 있다. 바츨라프 3세는 나이가 어려 놀기 좋아했던 탓에 중세 기록자들에게는 안 좋은 얘기를 듣긴 했지만, 오늘날 체코 역사가들은 오히려 나이에 걸맞지 않는 외교적인 수완을 갖췄다고 평가한다. [[알브레히트 1세]]와의 불화는 교섭을 통해 무난하게 해결했고, [[튜튼 기사단]]를 지원하며 동맹으로 끌어들이는 수완까지 발휘했다. 선왕 때 발을 들이게 된 헝가리 왕위 문제도 고집스레 왕위를 주장하지 않는 대신 실질적인 이득만 챙기고 빠지는 현실감각을 보이기도 했다. 10대 중반의 나이에 이 정도 정치 감각을 지녔으니 성인이 되어 더 오래 재위했더라면 보헤미아 뿐만 아니라 인근 여러 나라의 역사가 달라졌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나 암살당함으로써 명군은 커녕 '놀기 좋아하다가 암살까지 당했다.'는 오명을 뒤집어쓴채 본인뿐 아니라 프로셰미슬 왕조까지 허무하게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렸고, 이후 보헤미아, 폴란드, 케른텐은 각각 프로셰미슬 가문이 아닌 다른 이들의 손에 넘어가 각자의 역사를 밟게 되었다. 그나마 이전에 오타카르 2세의 사생아가 [[슬레스코]]의 [[오파바]] 공작위를 받아 그의 후손들이 공작위를 이어갔지만, 보헤미아 왕위 계승권을 주장할 수 없는 방계 가문이었고, 이들마저도 1521년 마지막 공작이 후손없이 사망하여 프로셰미슬 가문은 완전히 단절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